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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라면

'효녀 심청'의 고장에서 즐기는 이색 한옥마을 '심청 한옥마을' (곡성여행)

by 이청득심 2016. 6. 30.

    곡성을 여행 하면서 특이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심청'이란 단어입니다. 국도 17호선을 따라 곡성읍으로 들어가다 보면 도로 양 옆으로 '심청'이란 단어를 쉽게 볼 수 있죠. '심청이 마을', '심청 축제'등 심청이와 관련된 행사와 시설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청이하고 곡성하고 무슨 연관이 있지?"라는 궁금증이 머리속에 맴돌았는데요, 마침 '심청 한옥마을'이 있다는 이야기에 그 곳을 들렀습니다. 


   '심청 한옥마을'은 국도 17호선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옛 송정마을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을입구에는  '심청 이야기마을'이라는 큰 표지석이 있는데요, 마을 입구에서 10여분 정도 승용차로 올라가다 보면 '심청 한옥마을'이 나타납니다.  예전에는 '심청 이야기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심청 한옥마을의  입구에 들어서면 공영주차장이 있어 주차는 용이합니다. 입구에는 큰 안내판과 함께 심청이를 기다리는 심봉사와 연꽃잎에 선 심청이 조형물이 있어 이 곳이  심청 한옥마을 임을 쉽게 알수가 있었는데요,  심봉사와 심청이 조형물이  이 곳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의 맞이하여 주는 것 같아 재미있었습니다. 


▼ 심청한옥마을 입구에 있는 '심청이를 기다리는 심봉사' 조형물!


▼ 심청한옥마을 입구에서 우뚝 서 있는 아름드리 노거수^^


▼ 심봉사 조형물 맞은 편의 작은 연못에 있는 '심청이' 조형물


▼ 운치있는 물레방아도 있네요^^


  심청한옥마을 입구를 들러본 후 마을 안쪽으로 올라갔습니다.  마을 안쪽 입구에는 '심청 이야기 마을' 안내도가 있습니다. 근데 자세히 보니 '심청 한옥마을' 객실 배치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객실이라니??????   


▼ 공영주차장 위쪽에 위치한 마을 안쪽 입구^^


▼ '심청 이야기마을' 안내도이자 '심청한옥마을' 객실 배치도


  안내도의 '객실'이란 단어에 '이게 뭔가?'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께 여쭤보니 심청한옥마을은 한마디로 말해서 펜션 마을이었습니다.  기와 10동, 초가 12동으로 구성된 심청한옥마을은 '심청이의 고장'으로 떠오르는 곡성군에서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 문화인 효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전통 한옥으로 조성한 곳이라고 합니다.  


  정감어린 모습으로 조성된 한옥마을은 따로 입장료를 받거나 입장 통제를 하는 것이 아니어서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 마을 곳곳을 둘러보왔습니다. 


▼ 마을 안쪽에 설치되어 있는 '심청이 캐릭터'.  귀엽네요^^


▼ 안내도 오른쪽에 위치한 기와집!  연회 준비가 한창있습니다.^^


▼ 정감어린 모습의 초가와 담쟁이 담벼락의 모습^^







   마을 안쪽을 걷다보니 재미있는 우물이 보였습니다. 심봉사가 어린 심청이를 위해 젖 동냥을 하는 모습의 조형물이 있는 우물이었습니다. 우물 뒷쪽 초가집과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 젖 동냥을 하는 심봉사 조형물이 있는 우물!


  초가집들을 둘러보고 나니 기와집들이 나타납니다. 기와집에 들어가서 안을 살펴 볼수가 있었는데요, 각종 나무들과 어우러지는 모습들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을 옆에는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습니다. 다리로 연결된 저수지 건너편에는 족구장등이 있는데요, 그 곳에서 마을을 바라다 보는 전경도 아주 아름답습니다. 


▼ 다리 건너편에서 바라본 기와집! 때마침 투숙객이 올라가고 있네요^^


▼ 저수지 물에 비친 반영의 모습^^


▼ 심청한옥마을 입구의 모습! 정면의 큰 건물이 '송정관'이라는 연수원이랍니다^^


  저수지 주변까지 다 둘러본 후 다시 심청한옥마을 입구로 돌아오니 '송정가'라는 큰 기와집이 보였습니다. 이 곳은 일종의 식당인데요, 운치있는 이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 즐기는 식사도 맛있을 것 같았습니다.^^


▼ '송정가'의 모습


  옛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 고전 소설 중 하나인 '심청전'. "효녀 심청이"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일텐데요, 곡성군은 '심청의 고장', '심청전의 발상지'라고 합니다.  이는 곡성군에 있는 관음사와 관련한 연기설화 때문인데요, 서기 300년때의 이야기인 '관음사 연기설화'에 나오는 '효녀 원홍장 이야기'가 '심청전'의 원류라고 합니다. 


< 관음사 연기설화 원홍장 이야기” >


1. 원홍장(元洪莊)의 효심(孝心)

   대홍이라는 고을에 원량(元良)이라는 한 장님이 살고 있었다. 일찍이 부인을 잃고 홀로 되어 의자할 만한 일가 친척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는데 슬하에는 오직 홍장(洪莊)이라는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홍장은 어려서부터 착하고 아름다웠으며, 몸가짐이 보통사람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성품이 어질고 지혜로워 앞 못 보는 아버지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잠시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거동이 불편하지 않도록 보살펴드리며, 의복과 음식이 아버지의 마음에 맞도록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를 모셨다. 홍장의 효성이 이러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홍장의 크나 큰 효성을 칭찬하였고, 그 이름이 나라 안팎으로 널리 퍼져 멀리 중국 땅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님 원량이 마침 고을에 볼 일이 있어 나가다가 길에서 한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스님은 홍법사 (弘法寺법당 중수 책임을 맏은 화주승(化主僧) 성공(性空) 스님이었다. 성공스님은 원봉사를 보더니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절을 하고 말하기를 당신과 함께 영원히 남을만한 불사(佛事)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부디 나에게 큰 시주가 되어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갑작스런 말을 듣고 원봉사가 대답하기를 저는 가난하여 얻어먹고 살아가는 처지인데, 이렇게 부처님을 위하는  시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그러나 화주승 성공스님은 다시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소승이 화주하러 나오기 전날 밤 꿈을 꾸었는데, 부처님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내일 아침에 길을 나서면 반드시 장님을 만날 것이다. 그가 곧 이번 불사에 너를 위한 큰 시주가 될 것이니라.’ 하셨으므로 이렇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원봉사는 말을 잊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겨우 입을 열어 집에는 곡식 한 줌 없고 밖에 나와 봐야 내 땅 한 뼘없는 처지인데 무슨 수로 시주를 할 것입니까? 다만 나에게 어린 딸 하나가 있는데 법당을 짓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데리고 가서 좋은 도리를 생각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이 때 홍장의 나이는 불과 열여섯이었다. 이리하여 화주승 성공스님은 감사의 예를 올리고 원봉사를 따라 그의 오두막으로 갔으며, 아버지 원량은 성공대사와의 언약한 사연을 딸에게 말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홍장은 아버지와의 이별을 생각하고 애통하게 울었으며, 아버지 또한 몹시 슬퍼했다. 뿐만 아니라 산천이 모습을 바꾸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날아가던 새들과 짐승들조차 슬피 울부짖었다. 그녀가 아버지께 하직을 고하고 화주승을 따라나서니 길거리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가 부녀의 이별을 슬펴하며 옷깃을 적셨다.

 

2. ()나라 황후가 된 원홍장

     화주승과 함께 떠나 홍장은 산 넘고 물 건너 먼 길을 걷느라 몸과 마음이 피고한여 바다가 보이는 소랑포(蘇浪浦)에서 잠시 쉬면서 서쪽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때 잠깐 사이에 푸른 바다위로 붉은 배 두척이 쏜살같이 다가와 포구에 정박하였다. 그 배는 진나라 황제의 사신이 탄 배로, 금관옥패(金冠玉佩)를 하고 수의(繡衣)를 입은 사신(使臣)들이 배에서 내려와 홍장의 아름다운 용모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홍장에게 다가와 절을 하고 예를 갖추어 말하기를 참으로 우리 황후마마이십니다라고 하였다.

 

      홍장이 놀라 정색을 하며 이 무슨 말씀이십니까?”하고 묻자 사신들이 말하기를 저희들은 진()나라 사람입니다. 영강 정해년 오월 신유일에 황후께서 돌아가시어 황제께서 늘 슬픔에 잠겨 지내셨는데, 하루는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르기를 ‘새 황후 되실 분이 이미 동국(東國)에 탄생하여 장성하셨고 전 황후보다 더 단정하시니 돌아가신 전 황후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 슬퍼하지 마시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께서는 잠에서 깨어 날이 밝자 곧 폐백 4만단과 금은진보(金銀珍寶)를 갖추어 두 척의 배에 나눠 싣게 한 다음 관상을 잘보는 지혜로운 사람을 선발하여 사자(使者)로 삼아 명하기를 동국(東國)으로 달려가서 예법대로 황후를 모셔오라고 하시었습니다. 소신(小臣)이 외람되어 명을 받아 소임을 맡은 이래 지금까지 근심하고 염려하였는데 이제 다행히 아름답고 훌륭한 분을 여게서 뵈옵게 되었나이다.”

 

     사자의 긴 설명을 듣고 난 홍장은 탄식하면서 내 한 몸 가고 오는 것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만, 그렇다면 가지고 온 폐백은 얼마나 되옵니까?”하고 물었다. “예 저기 두 배에 가득 싣고 온 것이 모두 값진 보물이옵니다,” 라고 사신은 대답했다.

 

      홍장은 미소를 지으며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옵고 아버님을 위하여 선근종자(善根種子)를 심어 드리기 위하여 부처님께 바쳐진 몸입니다. 그러하오니 저 두 배에 싣고 오신 폐백을 소녀 대신 이 화주스님께 드리시면 기꺼이 따라 가오리다.”하였다. “예 부분대로 하겠나이다.” 이에 진나라 사신들이 두 배에 가득 싣고 온 진귀한 보물을 모두 홍법사로 가져가게 하고 홍장은 사신을 따라 중국 진나라로 가게 되었다.

 

    홍장이 진나라에 당도하여 궁 안으로 들어가 진나라 황제를 알현하는데, 아름다운 얼굴과 빛나는 눈망울이 덕()과 지혜(知慧)를 갖추 황후의 기상(氣像)이었다.

 

    “바다 한 모퉁이에 있는 동국(東國) 백제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더란 말인가?” 진나라 황제는 찬탄해마지 않았다 이리하여 황후가 된 홍장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니 황제는 황후의 말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모두 따르게 되었다황후가 된 홍장은 품성이 단아하고 인자하신 위엄이 하늘을 덮었으며, 언제나 정업(淨業)을 행하려고 노력하였다.

 

3. 홍장 황후의 신심(信心)과 원력(願力)

     또한 홍장황후는 석공으로 하여금 마노(瑪瑙)3천 개의 탑을 조성하게 하여 여러 나라에 나누어 주어 모시게 하였으며, “내 비록 타국(他國)의 보위에 오른 몸이지만 어찌 조국을 잊을 수가 있으리오.” 라며, 다시 오십삼불(五十三佛)과 오백성종(五百聖衆), 십육나한(十六羅漢)을 조성하도록 한 다음, 세 척의 석선(石船)에 실어 고국으로 보내면서 물결과 바람 따라 마음대로 가게 하니 마침내 감로사(甘露寺) 앞 포구에 닿았으며, 이를 감로사에 봉안하였다.

 

    석공이 늙자 높고 큰 뜻을 다시 세워 그 아들로 하여금 탑을 조성하게 하여 금강사(金剛寺)에 모셨으며 또 풍덕현(豊德縣경천사(敬天寺)에도 모셨다. 그런 후에 아버지의 복전(福田)인 대흥현 홍법사에 다시 불상과 탑을 정성껏 조성하여 보내니 왕복 다서 차례의 공덕을 원만히 성취한 것이었다.

 

    이렇게 고국을 위하여 공덕을 쌓은 후에 황후 자신의 원불(願佛)로 별궁에서 관세음보살 일존을 특별히 조성하게 한 다음 뱃사람들에게 명하여 석선에 싣게하고 동국으로 떠나려 할 때, “이 관음상은 반드시 이 배가 멈추는 곳에 모시도록 하여라.”고 거듭 명하였다.

 

     이에 뱃사람들이 명을 받들어 관음상을 석선에 싣고 동국으로 향하여 물결따라 표류해가게 하니 일정기간이 흘러 홀연히 바람을 따라 낙안(樂安) 땅 단교(斷橋) 곁에 정박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땅을 지키던 수비병들이 수상한 배로 의심하여 급히 쫓아가 붙잡으로 하였으나 관음상을 실은 석선은 바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움직여 아득히 먼 바다로 사라져 버렸다.

 

4. 성덕(聖德)과 관음사(觀音寺)

    이튿날 옥과에 사는 성덕(聖德)이라는 아가씨가 우연히 바닷가에 나와 홀로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니, 아득히 머언 해운중(海運中)에서 한 척의 작은 석선이 무엇에 이끌리듯 그녀 앞으로 다가와 멈추었다. 성덕은 석선위에 금빛 관음상이 있는 것을 뵙게 되고 홀연히 공경심이 일어나 몸을 굽혀 예배한 다음 친히 관음상을 등에 업으니 가볍기가 마치 새털과 같았다.

 

   성덕은 관음상을 등에 업고 낙안을 출발하여 고향이 옥과땅으로 향하는데 열두 개의 정자를 만나 쉬어갔다. 처음 쉰 정자의 이름은 알 수 없고, 두 번째 쉰 정자는 대취정(大鷲亭)이요, 세 번째 쉬어간 정자는 새암정(泉亭), 네 번째는 미타정(彌陀亭), 다섯 번째는 율목정(栗木亭), 여섯 번째 정자는 불휴정(不休亭)이라 하는데 그 곳은 조그마한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곱 번째 정자는 흥복정(興福亭), 여덟 번째는 현정(玄亭), 아홉 번째는 삽정(揷亭), 열 번째는 성덕아가씨의 고향으로 아흐레 동안머물렀다 해서 구일정(九日亭)이니 여기서 생각하기를 화순 땅의 백아산으로 갈까, 담양 땅의 추월산으로 갈까 또한 옥과 땅의 설산으로 갈까하고 망설였다고 합니다. 화순 백아산으로 갈 것을 정하고 출발하여 열한 번째 쉰 곳이 운교정(雲橋亭), 그리고 하늘에 맞닿을 만큼 가파른 고개인 하늘재를 넘었다.(열두 정자 이야기는 관음사 사적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구전되는 내용이다)

 

   관음상을 등에 업고 지금의 관음사 부근에 이르니 새털처럼 가벼웠던 관음상의 무게가 마치 태산처럼 무거워져 한 걸음도 놓을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이 곳에 관음성상을 봉안하고 절을 지어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홍법사 화주승 성공스님은 진나라 사신들이 폐백으로 가져온 많은 재물을 받아 채 한 달도 못되어 불상의 공덕을 일으켰고, 장님 원량은 딸을 이별하고 슬피 울어 흘린 눈물로 못 보던 눈이 홀연히 밝아져 광명한 세상을 보며 복을 누리고 살다가 95세에 돌아가셨다.


< 본 내용은 곡성기차마을의 음악분수 부근에 있는 '연기설화 표지석'에서 발췌 >


   이렇듯 심청의 고장인 곡성군에서 조성한 심청한옥마을은 단순한 마을이 아니라 체험형 관광 펜션 마을입니다. 한국 전통의 한옥집이지만 실내는 현대식으로 꾸며져 있는 심청한옥마을은 한옥집의 흙내와 깨끗한 산과 물, 그리고 자연의 바람 소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일텐데요, 10월에는 '심청축제'도 있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이 곳에서 머물고 싶은 곳이네요^^


< 심청 한옥마을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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